중학교부터 나름 재능이 있었던건지 공부를 며칠 안해도 항상 시험을 잘 봤고 다섯손가락 안에 꼽혔다. 나보다 성적 낮은 친구들이 특목고 자사고 열심히 준비해서 갈 때 귀찮아서, 가서 공부하기 싫어서 그냥 뺑뺑이 돌려서 가는 일반고를 갔다. 그래도 우리 동네 학교 중에 입결 좋은 학교들이 있었으니까 당연히 거기로 갈 줄 알았다. 근데 운이 없어서 나만 동네에서 제일 안 좋은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많던 친구들도, 어린 시절 놀던 동네도 다 두고 혼자 생활권에서 벗어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같은 중학교 출신은 채 5명이 안되고 친한 친구는 커녕 인사할 정도 친분도 없는 친구들 뿐이었다.
새로운 친구야 금방 만들었지만,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끼리 자주 노는 모습도 부러웠고 종종 만나려 했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애들끼리 더 친해지고 나는 더 멀어졌다. 여기서 받는 스트레스와 늦게 온 사춘기 때문인지 불만스러운 상황에서 오는 투정인지 모르겠는 부정적인 태도로 부모님과도 사이가 틀어졌고 안 그래도 소홀히 하던 학업 그냥 손에 놓았다. 그래도 해둔게 있어서 그런지 학교 수업만 들어도 전반적인 이해는 잘 했고 모의고사 직전에 벼락치기로 외우기만 해서 모의고사는 잘 봤다. 인서울 중상위권 의대는 갈 줄 알고 자만해있다가 수능에서 태어나서 해본 적도 없는 마킹 실수, 시간 분배를 안해도 항상 시간이 남았는데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그해 시험이 어려웠던걸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1교시에 그랬으니 나머지 시험을 제정신에 치를 수 있었을리가. 재수를 결심했고 부모님은 당해 성적으로 지방대 공대에 지원을 해두셨다. 나는 어디 학교 무슨 과인지도 모르고 재수를 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해서 성적이 정말 높았다. 내가 다니던 학원은 모의고사를 보면 성적 순으로 벽에 이름을 써뒀는데 이름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있으니까. 근데 그러다 보니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모르겠었다. 그냥 한 달 반짝 하면 충분한데, 나는 의대 가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그래서 설렁 설렁 했고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 학교는 갈 수 있었다. 근데 수능 날 이번에 못 보면 끝이라는 생각에 잡아먹혀서 글씨가 안 읽혔다. 그때 알았다. 아 수능은 누가 똑똑한지 판가름하는 시험이 아니구나 누가 열심히 했는지 그냥 습관처럼 관성처럼 문제를 푸는 애들이 잘 보는구나. 당연히 성적은 원하는 대로 안 나왔고 나는 그냥 포기했다. 나는 의지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관심도 없는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냥 운 좋게 성적이 좋아서 좋은 학교 갈 거라는 기대를 받았지 나는 그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차라리 내가 엄청난 천재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자만해서 노력도 안하고 자괴감이 느껴졌고 그냥 현역 때 쓴 지방대 공대를 갔다.
대학에 와보니 공학 공부가 너무 재밌었다. 맨날 똑같은 내용만 나오는 수학, 과탐이나 관심이 하나도 안 생기는 국어, 한국사를 공부하는 수능보다 훨씬 재밌었다. 남이 시키지 않아도 밤새서 공부하고 성적을 신경 쓰고 학점 나오는 전 날에는 안절부절해서 잠도 잘 안 왔다. 학점은 좋았고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먼저 공모전에 나가자고 나한테 말을 걸었다. 학부 연구생 같은 거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래서 안 했고 논문 써본 적도 없었다. 근데 운 좋게 SKP 대학원을 올 수 있었다.
내가 온 이유는 학벌 세탁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취업이 잘돼서도 아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단한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옆에서 구경하고 싶어서 왔다. 옆에서 보는게 정말 재밌다. 나는 생각도 못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일을 해내고 나도 자극 받아서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못생긴 대학교 건물 보다가 우리 학교 건물 보니까 너무 멋지다. 정말 공부가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착각이 들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교가 좋다. 그냥 퇴근하고 집 와서 심심해서 생각나는 대로 써봤다. 얼른 자야겠다. 다들 잘 자고 하는 일 잘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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