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대학원에 입학할 때 별로 큰 뜻이 없었습니다. 여기 계신 대단한 분들처럼 무언가의 대가가 되고 싶다, 이 분야를 연구해보고 싶다라는 생각 없었어요.
일보다는 공부하고 연구하는게 조금 낫다 정도의 생각, 학위 있으면 어딜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지라는 생각, 교수님의 교육적 가치관도 저랑 맞아보였고, 학점이 그리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제가 교수님의 교육관에 공감하다보니 교수님도 좋게 봐주시고 교수님 수업 성적도 좋았죠.
그런데 그렇게 뚜껑을 열어보니 정년을 코앞에 둔 교수님은 제 생각보다 훨씬 이상한 인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의 단점을 적으라 하면 3시간을 줘도 부족하지만 핵심만 적으면,
1) 지도를 안함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지도는 물론이고, 논문을 써 가도 한 글자도 안 읽으십니다. 그냥 설명해보라 하고 뭐 문제 없지? 하고 넘어갑니다. 학생들의 연구에 관심이 없습니다.
2) 연구 주제가 수시로 바뀜 본인이 전공하셨던 분야의 연구가 닫힌 주제라 생각하시고, open problem을 찾아다니십니다. 이 마인드는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은 주제를 한 학기 쓱 파보고 '나는 완벽히 이해했다'라면서 다른 분야를 찾아갑니다. 로보틱스 perception → NLP → 로보틱스 control → Vision language model → AI 반도체 이렇게 현재도 항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AI 반도체 공부하는 교수님이 '앞으로 이걸 계속 할거다'라고 해도 아무도 안 믿습니다. 학생들한테 "너네는 왜이렇게 도전정신이 없냐"라는 얘기를 수시로 하지만.. 우리는 눈앞에 디펜스를 앞두고 있고 노인네의 호사스러운 취미생활에 협조할 마음이 없습니다. 어차피 한 학기 뒤면 서랍장 안으로 들어갈 주제니까요.
3) 강의력 그렇게 연구주제가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본인이 공부하고 싶은 주제'의 강좌를 열고, 학기동안 그걸 공부하면서 강의를 합니다. 본인이 아는 분야가 아니에요. 일단 열고 공부하면서 강의를 합니다. 때문에 강좌의 질 자체가 바닥입니다. 오개념도 남발하고, 질문하면 아는게 없습니다. 강의 듣는 학생들은 죄다 혼란스러워 하고,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강의자료도, 과제도, 시험도 조교가 출제합니다.
옛날에 본인 전공 분야를 지도하시던 2010년대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셨는데, 새로운 분야를 찾아다니시면서 총기를 많이 잃으신 것 같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실질적인 지도를 못해주는 교수님 밑에 있으니 저도 방황의 시기를 거쳤습니다. 솔직히 작년(석박통합 2년차)에는 게임만 했던 것 같아요. 교수님이 NLP 시키시고 거기에 흥미를 느껴서 agent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데, 교수님은 이미 NLP에서 완전히 흥미를 잃었고 연구실에는 NLP를 전공하는 타 학생도 없고, 저희 세대는 윗 세대에 잠깐 대가 끊겨 있어서 연구실 선배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논문 써야 했죠.
그것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저도 노력 없는 지난 한 해를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올해 3월 즈음 교수님을 통해 외부 박사님 한 분께서 공동 프로젝트를 제안하셨고, 이 프로젝트의 저희 연구실 쪽 카운터 파트로 제가 배정되었습니다 (NLP 관련). 이 박사님께 "저희 교수님은 사실상 advise를 해줄 수 없다"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니, 타 연구실 쪽 젊은 신진 교수님 한 분께 involve를 요청하셨고, 지금 그렇게 셋이 연구를 진행중입니다.
솔직히 제가 일은 제일 많이 합니다. 교수님 한 분, 외부 박사님 한 분, 코스웤도 안 끝난 일개 대학원생 1명이다 보니 잡일은 실질적으로 공수가 들어가는 작업은 모두 제가 합니다.
그런데 불만은 하나도 없어요. 진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 고민을 해서 시니어들에게 가져가고, 시니어들은 그에 합당한 조언을 해주고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박사님께서는 실질적인 조언, 방법론적 조언을 해주시고, 그 쪽 교수님께서는 큰 틀에서의 방향성, 연구 범위 조정, 학계의 분위기 환기 등을 해주십니다. 처음으로 연구에 재미를 느끼고 있고, 제가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얻어가는게 많은 입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교수님은 그 와중에도 "인사 한번 드린다더니 왜 연락 한 통이 없냐, 이런 사람들이 일을 뭐 제대로 하겠어?"라는 꼰대같은 소리나 하십니다. 그러고는 저한테 거기에 과투자하지 말라고 하셨고, 저는 동앗줄마냥 내려온 희망이니 당연히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도저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졸업에 그래도 첫 발을 떼고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네요. 나름의 전문성도 생겨가는 중이고요.
결국 요지는 답없는 교수를 욕하던 시간에 이 사람의 네트워크를 활용했다면 더 빨리 이런 진일보의 감각을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지도력 없는 교수들 밑에서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연구하고 계신 많은 학생분들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교수 밑에서 졸업한 모든 선배들, 그 교수에게 컨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상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교수 본인이 지도를 해주지 못한다, 그걸 꼬집어 말하기도 어렵다 하시는 분들은 그 네트워크라도 최대한 능동적으로 활용해보는걸 권유드립니다. 개중에는 사기꾼도 왕왕 있지만, 개인적으로 전 그런 사기꾼들이 지도적 측면에서는 저희 교수님보다 낫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결국 그 교수를 욕할 시간에, 그런 교수라도 나를 위해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를 고민하는게 더 생산적이었다는.. 경험을 두서 없이 풀어내 본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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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2025.08.09
교수 욕하는 학생들 중 인성 정상인 사람 없더라. 다 자기 부족함을 교수한테 투영할 뿐.
202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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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지도력 없다고 느끼는 이유가 공부 안 해서가 아니라 타분야를 너무 열심히 공부하셔서인거네요ㅋ 그건 절대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분은 그냥 정말 공부가 재밌어서 교수하시는거네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연구자의 모습과는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분이 학생 잘 가르치는 교수는 아닐지라도 좋은 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궁극적으로 통섭에 다다를 수도 있겠죠. 밑에 있는 어리석은 중생들이 문제인건데 님도 위기 의식을 느끼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길을 찾게 되고 그러면 또 결국 살아남게 되는거죠. 고생은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님은 스스로 살아남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건 학생 때 (+포닥 시절) 겪어봐야 되는게 맞고 님의 상황이 결코 특수하거나 문제가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님 지도교수님이 답없다는 얘기 들으실 분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더 존경스러운데요.
2025.08.09
2025.08.09
대댓글 1개
202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