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연구비는 주로 PI들에게 주어졌지만,
최근에는 박사과정생이나 프레시 박사에게도 많은 연구비가 풀려있습니다 (연구재단과제 기준).
예컨대 곧 마감이 되는 박사과정생연구장려금, 창의도전연구,
그리고 저번주에 발표가 났던 세종과학펠로우십과 박사후연수 등이 있습니다.
연구제안서를 처음 쓰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제가 받았던 코멘들들을 중심으로 제 경험을 공유드리려고 합니다 (코멘트는 일부 각색하였습니다).
1. 연구'계획서'를 쓰지말고 연구'제안서'를 써라.
연구계획서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다"이고
연구제안서는 "이렇게 중요한 연구를 이런 능력과 선행연구결과를 가진 내가 체계적으로 연구할테니 돈을 주십시오" 입니다.
연구제안서의 요소는 크게 3가지 입니다.
1.1. 연구의 중요성
연구의 중요성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써야합니다.
거의 일반인의 수준에서 이 연구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사자들은 제 연구의 전문가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와 같이 생명과학을 연구한다면 궁극적으로 임상 및 치료법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안할 수 있어야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부족해서 심사 코멘트에서 지적을 받았습니다.
"제시된 연구가 임상적으로 어떻게 검증 및 적용이 가능할지 고민이 필요함"
"환자에게 본 과제의 연구결과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과 실제 환자샘플분석 및 적용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의 보완이 필요함"
"어떻게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연구로 발전할지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보임"
저는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임상적인 접근이 어려워서 그 부분을 작성하지 못했는데,
어떻게든 고민해서 넣었어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보다 해야만 하는 것들을 더 넣어야 했던 것이었죠.
1.2. 연구자의 능력과 선행 또는 예비연구결과
*편의상 선행연구결과는 발표된 논문의 결과, 예비연구결과는 미발표 연구의 결과를 지칭합니다.
연구비를 주는 심사자 입장에서는
이 제안서가 실제로 실현이 가능한지, 그리고 실적으로 나올 수 있는지를 가장 민감하게 평가합니다.
따라서 심사자들은 연구자의 능력과 선행 또는 예비연구결과가 얼마나 있는지를 면밀하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1.2.1. 박사과정생
박사과정생이라면 대부분 선행연구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국제학술지에 제1저자로 낸 논문이 있다면 거의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1) 실험실(또는 본인)에서 본 연구를 꾸준히 수행해왔음
2) 연구자 본인의 예비연구결과가 충분함
으로 심사자를 설득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제가 받은 코멘트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연구자의 선행연구와 예비결과를 바탕으로"
"신청자는 국제학술지에 1저자로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연구수행역량이 높은 것으로 판단됨"
심사자는 박사과정생의 연구 능력을 평가할 척도가 사실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험실 차원에서 충분히 협력해서 이뤄낼 수 있는지,
그리고 이미 충분한 선행 또는 예비연구결과를 가져서 연구를 잘 마무리할 수 있는지가 주요 평가척도가 될 것입니다.
1.2.2. 프레시 박사
프레시 박사라면 박사과정 때의 실적이 있을 것이고,
그 연구에 영혼을 갈아넣었기에 아마도 예비연구결과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1) 선행연구결과의 우수성을 충분히 피력
2) 연구제안서에 쓴 연구를 실제로 수행할 능력이 있음
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좋은 전략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어필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제가 받은 코멘트들로 비춰봤을 때 그 노력은 다행히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책임자의 연구 경력 및 실적으로 판단하건대, 제시된 과제를 수행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됨"
"연구 업적을 갖고 있음"
"본 연구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한 연구 경험이 있으며"
"연구책임자의 관련분야 연구 실적이 있음"
1.3. 연구추진체계
심사자들은 제 연구분야에 있어서는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연구계획의 디테일보다 추진체계를 봅니다.
즉 큰 그림을 잘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1.3.1. 그림을 크고 분명하게 그려라
그림으로서 한 눈에 본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며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쁘게 정리된 그림을, 크고 선명하게 그려주세요.
심사자들은 2쪽 모아찍기로 평가하기 때문에 모니터로 보는 그림보다 훨씬 더 작은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그림의 크기와 폰트는 클 수록 좋습니다.
2쪽 모아찍기로 프린트해서 꼭 보시고,
한 눈에 잘 들어오는지 실험실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특히 저연차 학생들) 피드백 받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저는 이 부분을 나름 신경썼다고 생각했지만, 아래의 코멘트를 보면 좋은 점수는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단, 계획서를 작성할때 그림을 좀더 부각시키지 못한 점이 아쉬움."
"연구가설에 대한 설명 그림이 복잡함. 심사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함."
1.3.2. 연구 순서를 잘 나눠라
생명과학을 기준으로 연구의 기본적 순서는
1) 현상관찰
2) 연구가설 수립
3) In vitro 실험 및 검증
4) In vivo 확인
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연구제안서에 이 내용이 들어가겠지만,
연구 순서 또는 수준을 명확하게 나눠서 연구제안서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내용을 혼재해서 쓰시기보다 번호 또는 단락으로 나눠서 표현하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첫 연구제안서를 썼을 때 이부분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연구내용을 수행하기 위한 연구추진전략이나 방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있으면 좋았으리라 판단됨"
그 후에 저는 제안서를 작성할 때 이부분을 많이 신경썼고, 다행히 이번에는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습니다.
"A인자 및 B세포를 동정하고 그 이들의 기능분석 및 C 변형동물 모델을 제작하여 X의 특성까지 규명하는 등 연구방법과 추진 전략이 잘 구성되어 있으며,"
"선행연구 결과 기반으로 연구추진체계도 매우 적절하게 구성되어 있음"
"연구과제의 추진체계가 매우 구체적이며"
2. 심사자의 눈으로 글을 써라.
연구제안서의 독자는 심사자이고,
이 제안서가 채택되기 위해서는 심사자를 설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심사자들을 이해하는 것은 제안서 채택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2.1. 양식을 지켜라
같은 가이드라인을 지닌 글을 여러 개 보면
양식을 무시하고 개성있게 쓴 글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1) 지나치게 폰트가 작거나 (9 이하),
2) 지나치게 좌우여백을 줄이거나 (15mm 이하)
3) 1.2.3.4.5. 기본 제목을 지키지 않거나 (연구재단 양식이 아닌 다른 양식 사용)
4) 작성 요령을 무시하는 일들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납니다.
작성 요령을 잘 보시고 지키라는 것들은 최선을 다 해 지켜주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2. 첫인상을 잘 줘라
심사자들은 보통 제한된 시간 내에 많은 연구제안서를 빠르게 평가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부분 1~2쪽을 읽고 받은 인상이 중요합니다.
(교수님들과 대화해보면 1~2쪽 보고 점수를 결정하는 심사자들도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1~2쪽에
1) 연구의 중요성 그림
2) 연구의 최종 목표 그림
을 최대한 예쁘게 해서 넣어주세요.
그래서 심사자가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3. 노안인 분들이 두 쪽 모아찍기를 해도 잘 보일 수 있도록 편집해라
심사하시는 분들의 연배는 모니터보다는 활자에 익숙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간과할 수 있지만 매우 중요한 요소는 심사자의 대부분 노안이 오시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제 지도교수님께서 최근에 정말 많이 부탁하시는게
가까운게 잘 안보이니 부디 크게 뽑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쪽 모아찍기(연구재단 형식 기본값)를 해도 최대한 크고 선명하게 편집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2.4. (본 연구에 있어서)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써라
본인의 연구는 사실 본인을 제외하고는 잘 모릅니다.
같은 연구실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인데
심사자들은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해 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어, 전문용어는 가급적 풀어서 작성하고
디테일한 내용보다 연구의 의의와 목적을 중심으로 서술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3. 나가며.
제가 쓴 연구제안서를 공유드리면 좋겠지만,
그건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어서
제가 받은 코멘트와 실험실 사람들과 연구비를 같이 쓴 경험을 바탕으로,
순전히 개인적인 팁을 드려봤습니다.
박사과정동안 개인연구제안서를 포함해서
삼성재단연구, 중견연구, 리더연구, SRC급 연구제안서 등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참여해보니
연구비를 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개인 또는 실험실의 연구실적이 연구비를 따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요소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저희 실험실만 해도 지도교수님을 포함한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저희보다 실적이 좋은 연구실을 경쟁에서 이기고 연구비를 따낸 경험이 있습니다.
그 연구비가 마련해준 환경 덕분에 저도 개인연구비를 따낼 수 있었고요.
부디 모두 건승하시고,
부족한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셔서
좋은 환경 속에서 연구하시길 바랍니다.
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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