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고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안나지만 고등학생 꼬맹이 시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물리 선생님이 성경인가 무슨 기도문인가에서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나 아무튼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당시 생각으로는 그것이 교사로서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에 저는 제가 할 수 없는 것 같은 것과 싸우고 있었거든요.
동네 보습학원 정도는 다녔지만 큰 사교육이나 부모님 도움 없이 과학고에 들어가는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들어가보니 다른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경제적인 여건이나 학습 환경의 수준이나 부모님의 도움 같은게 너무 차이가 커서 내가 극복하기 어려운 벽처럼 느껴졌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1학년 내내 중하위권을 못벗어났고 항상 돈에 쪼들려 살았어요. 처음 과학고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내 욕심에 이런데 와서 가정 경제를 파탄내서 고생하는 부모님께 너무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불공평한 세상에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러다 1학년 겨울 방학을 지나고 나니까 갑자기 중상위권으로 점프를 했고 가속이 붙어서 2학년 2학기 쯤에는 최상위권까지 성적이 오르더라구요. 학교 안에서 제가 무슨 비밀 과외를 받았다는 헛소문까지 돌아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저희 엄마를 찾는 학부모들 때문에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먹고 사느라 바빠 죽겠는데 한가한 여편네들 때문에 귀찮아졌다고 하시더라구요. 뭔가 불공평한 세상에 작은 복수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때의 성공 경험이 저를 노력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한계라는 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한계를 조금 넘는 목표를 세우고 정신 없이 달리다 보면 나의 한계를 점점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게 습관이 됐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은 문제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가슴 아픈건 부모님의 삶의 무게를 내가 대신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예전에는 어른이 된다는게 지금까지 자신의 짐과 나의 짐을 짊어지느라 고생한 부모님과 자리를 바꿔서 내가 그 짐들을 짊어지는 것이라 생각했고 내가 기꺼이 할 수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서야 부모님의 삶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서 어른이 된다는 건 내 짐만 들고 내 갈 길을 떠나가는 것이라는 걸 어디서 배웠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내 삶을 잘 사는 것 밖에 없다는 것도요. 머리로는 아는데 여전히 그들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여서 안타깝고 서글프고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없어서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저는 연구에 대한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른 사람보다 높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느끼기에 아름다울만한 연구를 해보고 싶은데,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나뉘어 있다면, 그것은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요 할 수 없는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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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2023.11.02
누적 신고가 20개 이상인 사용자입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빠르게 구분하여 주제를 선정하는 능력은 연구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능력이고, 왠만한 연구 짬으로는 잘 안 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꼼꼼한 리처드 파인만*
2023.11.02
부모의 삶은 부모의 것이고, 본인은 본인의 삶을 사시면 되고, 그게 효도입니다!
취한 그레고어 멘델*
2023.11.02
적정한 분량의 호기심을 이끄는 도입부부터 흡입력있고 간결한 문장, 그리고 글의 목적과 화자의 고민이 명백히 드러나는 결론부까지 아주 훌륭한 글쓰기네요. 진정성이 느껴지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글쓴이님과 같은 고민을 합니다. 부모님의 짐을 내가 어떻게 나누어 가질 수는 없을까, 내가 받은 깊은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항상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주제넘지만 제가 내린 현재까지의 잠정적인 결론을 공유드리자면 "일단 내가 잘 되고, 잘 살고, 자주 찾아뵙고 연락드리자" 입니다. 자주 연락드리는 것만으로도 많이 좋아하시더라구요. 가능하면 자주 찾아뵙고 싶은데 제 한몸 건사하는 것이... 그리고 삶 자체가 녹록치 않아 말처럼 쉽지는 않네요.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가며 얼굴비추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ㅎㅎ.
2023.11.02
2023.11.02
2023.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