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가 적성에 맞지 않는 대학원생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SPK 같은 학교에서 학석박 전부 밟고 있는 자연 계열 전문연구요원 근무 중인 대학원생입니다.

석박통합과정으로 들어와 대학원 연차로 따지면 4년차가 되는데,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대학원 생활을 보냈습니다. 생각해 보면 대학원에 들어온 이유 자체부터가 엉망진창이었는데요.

- 학부 성적은 그럭저럭 잘 나왔기도 하고, 대학원 진학 비율이 높은 학과 특성상 대학원을 학부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 군대 문제. 죽어도 군대를 현역으로 가기는 싫었고, 전문연구요원으로 대체복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큰 요소였습니다.
- 연차대로 졸업하면 만 27세이고, 연구가 맞지 않는다면 그 때 새로운 진로를 찾아도 늦지 않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했네요.

그래서 별 고민 없이, 생각 없이 자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렇게 들어온 대학원 생활은 정말 즐겁지 않았습니다. 연구실은 새로운 주제를 찾는 분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해서 저희는 저희가 할 연구를 스스로 찾아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주제를 찾아서 연구를 진행하여도 마땅한 결과를 내지 못하기 일쑤였고, 그 과정에서 지도교수님에게서도 큰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아이디어와 실험 등등을 저희 스스로 구상하여야 했고, 교수님께는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및 검토받는 것에 그쳤습니다. (영어 실력이 미천해 교수님께 영어 작문에 도움을 받은 것이 가장 큰 도움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사실 지도교수님을 blame할 수도 없는 것은, 저 역시 다른 대학원생들같이 연구에 매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문연구요원 근무 시간만 채우고 칼같이 퇴근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어떻게든 잡은 연구 주제도 어떻게든 교수님께 꾸준히 보고할 수 있을 만큼만 적당히 진행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만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것은 다름아닌 지도교수님 자신에게서였습니다. 학생은 가만히 보면 교수님한테 혼 안 날 정도로만 적당히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보통은 지도교수님한테 이런 말을 들으면 억지로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로서 실격인 마인드라는 것은 알지만, 연구하는 것이 그저 일이라고 생각되었고 근무 시간에 그 일을 수행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에서 떠도는 열심히 일하는 학생들같이, 매일 자신의 사생활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연구에 매진할 자신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최근 연구과제로 첫 SCI 1저자 논문이 accept되었고, 어떻게든 몇 편인가를 더 채워서 졸업하는 것 자체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졸업한다고 쳐도, 고작 이 정도 연구 실적으로 박사급 취직이 가능한 것인가? 애초에 이런 글러먹은 마인드를 가진 학생이 연구직에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런데 연구직을 가지 않으면 내가 갈 자리가 있긴 한가? 라는 생각만 많이 듭니다. 김박사넷을 비롯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연구역량 면에서도, 성실성 면에서도 훨씬 뛰어난 학생들도 본인의 진로에 대한 상세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저는 그냥 막연히 졸업할 만큼 연구 실적을 쌓다 보면 그래도 SPK인데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는 마음가짐으로 진로 조사도 제대로 진행해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연구실적이 될 논문도 연구소 과제의 파생 연구로서 개인적으로는 차마 누구한테 내놓기 부끄러운 수준의 연구라고 생각하고 있고, 무엇보다 제가 희망하고자 하는 연구 분야와 주제가 상당히 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작 제가 나름대로 노력한 주제의 경우 다른 사람이 먼저 더 좋은 방향의 해결책을 내거나 실험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데 실패하기 일쑤고 아직도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뭔가 시작하기는 뭔가 찾을 수 있을지가 너무나 두렵고 졸업까지 남은 시간에 맞추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연구 자체가 싫증이 나는 것도 있지만 주어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것을 석박통합 4년차인 지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억셉된 논문의 경우 명확한 목표가 (연구과제였던 만큼) 주어져 있었고, 그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논문을 조사해 나름대로 novelty가 있는 방법론을 제시해 실험으로 검증하여 논문화할 수 있었는데, 과제가 아닌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 방향이라는 것은 목표도 vague하고 내용도 알맹이가 없는 상태로 표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문제풀이를 좋아하는 학부생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고 자부합니다(?).

무사히 졸업하게 된다면 졸업까지 1년 6개월이 남은 이 시점, 연구자로서의 정체성, 박사 졸업 후 진로나 인생 계획 등에 대한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습니다. 김박사넷을 비롯해 나보다 훨씬 성실한 태도로 훨씬 많은 연구 실적을 가진 사람들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는데, 이런 글들을 보다 보면 나같은 사람은 그냥 박사 졸업 후 백수가 되는 것이 맞는 게 아닌가? 라는 자괴감이 먼저 듭니다. 애초에 SPK 박사라는 사람이 꼴랑 SCI 한두편 들고 졸업할 경우, 누가 나라는 사람을 buy해줄지도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구요. 그렇다고 포닥을 진행하자니, 이런 마음가짐으로 포닥을 진행한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긴 대학원 생활동안 얻게 된 교훈은 현재로서는 제가 연구에 적성이 없다는 것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어딘가에서 연구원으로 지낸다는 것은, 그저 표류하는 대학원 생활의 연속일 뿐 계속 이런 고민 속에서 지내게 될 것 같습니다. 연구 이외에 명확히 하고 싶은 다른 직업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요...

그래서 이 신세한탄을 보고 어쩌라는 것인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이런 말을 실명으로 누군가한테 말하기도 그렇고, 이런 곳에밖에 쓸 수 없는 내용이라서 그런 점도 있습니다. 다소 많이 경황이 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따로 위로의 반응을 받으려고 쓴 글은 아니고, 오히려 제가 현실 인식을 따끔한 댓글을 써 주시면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저 지금은 제가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전혀 그려지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막막하기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