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직장인D] 신입인데요, 신입이 아닙니다. - 상편

[한심한 직장인D] 신입인데요, 신입이 아닙니다. - 상편

멘탈이 안 좋을 때 글을 적습니다. 



졸업을 앞둔 연구실 후배랑 잠깐 얘기를 하는데, “박사로 회사에 들어가면 확실히 일반 신입이랑은 대접이 다르지 않아요?”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음… 한 반 정도 맞는 것 같다.


박사 신입이라고 대단한 걸 해주는 건 아닌데, 그냥 약간은 더 조심스럽게 대해주는 것 정도(가끔 아예 안 대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다른 신입보다 나이가 많아서이기도 할…테지만 어차피 박사 신입도 들어오면 거의 부서 막내인 건 마찬가지다.


박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있다고는 해도 내가 하고 다니는 걸 보면 별로 그렇지 않을 텐데… 아무튼.





회사로 출근한 첫날, 당시 상사였던 부장 앞에 당도하자마자 받은 질문 3콤보는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

“학위논문 제목이 뭐야? 무슨 연구했어?”였다.


다행히 앞에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기억이 났는데(이젠 나이 물어보면 대답하는 데 한참 걸림), 불과 두 달 전에 도서관에 제출하고 나온 학위논문 제목이 생각이 안 났다.


"너무 미천해서 기억이 안 나나봐요… 허허"하고 마찬가지로 흐린 기억 속에 있던 연구 설명을 겨우겨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회사 생활 살짝 말렸던 것 같다.





대충 팔짱 끼고 듣고 있던 부장 눈치를 보니 딱히 연구가 궁금했다기보다, 처음 보는 박사가 눈앞에 있으면 자동으로 하고 보는 질문이었다는 게 느껴졌다.


분위기를 감지하고 하던 설명을 최대한 빠르게 마쳤다.


부장도 “그래 잘 왔어, 이 프로젝트엔 비슷한 레벨의 또래 선배들 많아서 배우기 좋을 거야. 그럼 이제 컴퓨터 받아와야지?”라는 말로 최대한 간결하게 환영을 마쳤다.


그게 서로 만난 지 10분 정도 된 시점이었다.





컴퓨터는 그날 바로 나오진 않았다.


며칠 동안은 인력 동원이 필요한 일에만 불려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마다 신입 컴퓨터는 언제 나오냐고 날 붙잡고 물어봤다.


그때 그게 얼마나 악랄한 질문이었는지 이젠 좀 알겠다.


그리고 며칠 뒤, 왜 사람들이 신입 컴퓨터를 나보다 애타게 찾아다니고 있었는가를 바로 알게 됐다.


컴퓨터 셋업이 끝나자마자 지금 부서의 기본적인 각종 전산처리 작업을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저는 스파르타 스타일이에요^^ 실수하면서 배워야죠^^”라고 했던 사수의 목적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이 21세기형 수작업을 똑같이 할 수 있는 그의 아바타를 만드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난 입사한 지 두 달이 채 못 됐을 때부터 주말에 혼자 나와 필요한 전산 대응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직 그래도 수습이었을 때였는데.





회사에서 박사 신입사원을 대하는 모습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실무 선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박사 받고 회사 왔는데 이런 것까지 시킬 줄은 몰랐죠? 내가 박사인데 이런 것까지 해야 되나 싶죠?”였다.


난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텅 비우고(그래서 자기 학위논문 제목도 잊어버리고) 입사를 해서 그런 건 전혀 없었는데, 듣고 보니 누군가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수면 아래에서 사정없이 발장구를 쳐야만 호수 위 자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백조처럼, 보고자료가 쉼 없이 오가는 뒤엔 잘 보이진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수작업들과 잡일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난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잡일을 너무 좋아한다.


당장 내일도 오후 내내 커다란 잡일이 하나 예정되어 있는데, 그걸로 반나절을 보낼 생각에 설레고 있다.





박사인데 이런 잡일하니 어떻냐는 둥 질문을 자주 받았다는 건, 날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박사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난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다(말하면 그게 진짜 더 이상해).


나중에 알고 보니 이름이랑 직급 가지고 조직도에서 사번을 검색하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과장이니 얜 빼박 박사네’ 하고 날 만나러 오는 것이었다.





박사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한 신입들이 회사에 있기는 있다.


그런 분들에겐 주로 ‘내가 할 일’과 ‘나까지 오지 말아야 할 일’의 구분이 아주 명확했다.


그리고 나에게 박사님인데 이런 일까지 하시네요 했던 선배들도 막상 진짜 그렇게 박사 부심을 부리는 사람을 보면 욕을 했다.


회사란 그런 곳인 것 같다.




편집자 주: [신입인데요, 신입이 아닙니다.]은 시리즈물 형식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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