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사학자가 남겼던 이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얼마나 권력이 쉽게 부패했는지, 그리고 권력이 강할수록 더 쉽게 부패한다는 것을 잘 상징한다. 막강한 권력 일수록 스스로 청렴도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류사에서 수없이 경험하였기 때문에, 대중은 그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으려왔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으로 대중은 좀더 나은 삶을 쟁취해 왔으며 이로써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 다만, 그 견제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수많은 부정부패 관련 뉴스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견제 시스템이 잘 작동 하던 안 하던, 권력의 부패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최소한 권력이 대중의 눈치 정도는 보도록, 우리는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견제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교수는 대학원생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학위 기간중의 모든 것, 학위 수여 여부나 기간부터 출근시간, 퇴근시간, 휴가, 인건비와 같은 생활과 관련된 거의 모든 대소사가 교수의 재량아래 있다. 교수가 대학원생에게 법적으로 처벌 받을 수도 있을 행위를 하였을 때, 공론화 하여 부당함을 폭로하려면 대학원생은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학위과정을 위해 쓴 시간, 쓰려고 했던 시간. 지독히도 좁은 학계에서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몇년 전 있었던 인분교수 사건은 중형을 받을 만한 행동이었고, 실제로 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법과 단순한 도덕적 비난 정도의 경계선쯤에서 가해지는 인격모독, 비합리성 및 부당함 들은 쉽사리 공론화 될 수 없다.
대학원생은 그 싸움의 결과, 또는 판결이 나오는 순간이 아닌, 싸움을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위플래시’에서 플레처 교수가 가르침이라는 미명아래 자행한 모욕은, 분명 애매한 경계선에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는 가르침의 방식이다라는 변명이 넓게 용인되기 때문이다. 영화보다 심각한 것은 지도 방식만 플레처와 같이 반인권적이지만 실력이나 방향은 전혀 전문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학계가 아닌,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리더들이 이러한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그들의 조직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난 잘 모른다. 단지, 이러한 문제는 아마도 꽤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비교적 투명한 집단일수록 이러한 리더는 외부와 내부의 견제와 자정작용 속에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는 자정적용과 권력견제의 절대 사각지대이다.
우리는 인분교수는 처벌할 수 있지만 현실의 플레쳐는 처벌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시스템이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이 절대 부패할 권력에 대한 견제 시스템이,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지만, 하루 빨리 갖추어 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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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201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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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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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3
절대 권력은 부패할 수 밖에 없죠.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게 권력자의 양심밖에 없으니까요.
교수도 마찬가지인거 같아요.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오로지 교수 양심에 맡기고 있으니..
2019.12.13
2019.12.13
2019.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