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되실만 합니다. 사실 저도 박사과정 들어오기 전에, 들어와서, 계속 고민했습니다. 이게 맞는 것인가... 젊음을 낭비하는 것 아닌가, 돈이 되나 등등.
지금은 그래도 과학에 확신을 얻었습니다. 과학이 너무 재밌고, 연구실 생활이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의 관점에서 연구실 및 분야 선택에 대한 제 관점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1. 학교 vs 교수님
이상적으로는 좋은 학교의 좋은 교수님이 계시다면 좋겠지만, 능력여하를 떠나 fit이 맞지 않서라도 조인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교수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을 거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집니다. (저희도 그게 참 고민입니다)
하지만 좋은 학교가 아니면 좋은 교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recruiting 할 때 보통 자대생들에게 visibility를 확보할 가능성이 크니, 학부 인재 풀의 퀄리티는 중요합니다. 펀딩을 딸 때도 학교 이름이 유명하면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있겠죠. 결국 Trade-off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고민을 해야 한다는, 뻔한 얘기입니다.
저의 경우를 공유하면 SPK를 가고 싶어도 못간 케이스인데 ㅎㅎ 다만 제가 가서 돋보이지 않는 이상 나에게 좋은 기회가 올 확률은 희박하고, 솔직히 서류 합격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름 만든 criteria는 대학원이 활성화 된 학교들 중에서 존경할 수 있는 교수님께 배우자, 그리고 아마 tenure 안받으시면 목줄 잡고 논문 같이 써주시겠지 (...), 조교수 위주로 컨택 해보자, 하는 나이브한 criteria 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Criteria 자체는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존경할 수 있는 교수님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행복한 대학원 생활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결정은 자기 가치관으로 하는 것인데, 과학자가 되고 싶으시다면 학교 이름을 한번 빼보고 여기 가보면 어떨까 생각 한번 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2. 분야 vs 교수님
많이 하는 얘기이긴 한데, 교수님은 참 좋은데 분야가 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저도 고민을 진짜 많이 했습니다.
지금 제 생각은, 역시 과학자로서 생각하면 고민이 더 쉬워진다고 봅니다. 왜 과학을 하지, 이런 생각을 해보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그게 뚜렷하지 않은 경우도 있겠죠. (솔직히 전 뚜렷하지 않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경우는 대학원을 왜 쓰는지를 잘 모릅니다... ㅈㅅ)
저의 경우에는 과학의 문제까진 아니어도 방향성 정도는 갖고 컨택을 했는데, 학점이 안좋아서 다 까였습니다. 지금 랩은 솔직히 분야가 아예 안맞고 심지어 관련 과목도 하나도 안들었는데, 교수님께서 감사하게 받아주신 후 제 방향을 지원해 주시고, 제 방향성을 어떻게 이 분야에 붙일까 하는 고민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로 저희 분야 탑컨퍼 한편을 석사과정 때 쓸 수 있었습니다. (진심 영광이었죠...)
분야가 맞나요? 라는 질문은 사실 교수님께 여쭤보시면 딱 답을 주실거라고 봅니다. 분야마다 일을 벌리는걸 좋아하는 분야가 있고, 정해진 문제를 아주 잘 풀기 위해 노력하는 분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쪽이 다 필요하고, 각각의 가치가 있고, 모두 과학입니다. 특히 전자의 경우 과학의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과학사에 보면 그런 의심을 통해 쭉정이가 걸러지고 어떤 새로운 학문이 많았으니까요. 그 도전들은 건강합니다.
즉, 이건 학생도 고민을 많이 해봐야겠지만, 그 고민을 갖고 컨택할 교수님께 가서 여쭤보세요. 그리고 돌아온 답이 acceptable하면 그때 고민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동료들 vs 교수님
교수님도 중요하지만 동료들이 진짜 중요합니다. 같이 discussion 하고, 밥 먹고 등등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건 대부분 동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건 안타깝지만 동료들의 손을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교수님이 좋은 분이셔도, 바쁘셔서 시간을 못내주시면 얻어가는 것에 한계가 생깁니다. 또한, 교수의 본질을 교육자와 연구자로 나눠서 생각해봤을 때, 교수님께서 좋은 연구자이셨을 수 있지만, 좋은 교육자인 것은 또 다른 전문성과 문제더라구요. 좋은 교육자셔야 좋은 동료들을 뽑고 키우실 수 있고, 그래야 교육의 효율이 올라갑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 측면에서 매우 만족합니다. 저희 연구실 사람들, 진짜 좋고요. 특히 교수님은 항상 동료의식을 강조하십니다. 나는 앞서 있는 것이지, 신이 아니고 advisor이자 너네 선배니까, 내 얘기가 틀렸으면 얘기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런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저희 랩에는 랩장이 없고, 단체 랩미팅은 공유를 위한 자리이지, 기본적으로 1:1 미팅을 가지고 교수님과 논리를 갖고 싸우고 설득시키고 납득당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저희 연구실에서 교수님도 동료십니다. 그래서 너무 든든합니다.
물론 이것도 모든 분야와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다만 저는 제 상황 밖에 모르다보니, 제 상황에서는 이런 부분이 만족스럽습니다, 정도의 얘기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커뮤니티에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니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4. 결론
저희 랩에 아직 박사 졸업생들이 없어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저희 연구실 생활이 쉽진 않은데, 최소한 저는 행복합니다. 내가 빌런인가...? 생각해봤는데, 남이사, 여튼 저는 좋아요. 그리고 저희 교수님께서 채용공고를 페북에 올리시니 안시켜도 알아서 다 공유하는걸 보면 뭔가 여기서 배워갈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꼭 좋은 학교의 좋은 연구실 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인생이 행복합니다.
p.s.
막간의 광고인데, 저희 랩에서 석사과정과 postdoc 연구원을 1-2명 채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포스닥 분들 기다립니다...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논문 재밌는거 쓸거 많아요!)
교수님 채용공고를 여기다 복붙했다가 어떤 문제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서, 제 메일 (jaewon-choi@yonsei.ac.kr) 로 연락을 주시면 구체적인 연구실 정보를 reply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저희의 연구 분야는 EE/CS에 걸쳐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임베디드 시스템과 모바일 컴퓨팅, Human Computer Interaction 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김박사넷 글 두개도 공유합니다.
- "연구자로 살길 잘했다.": https://phdkim.net/board/free/20963/
- "임팩트 포럼에 올라간 "연구자로 살길 잘했다" 라는 글을 썼던 사람입니다. 대략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근황 전합니다.": https://phdkim.net/board/free/28893/
카카오 계정과 연동하여 게시글에 달린 댓글 알람, 소식등을 빠르게 받아보세요
댓글 5개
2022.04.07
누적 신고가 20개 이상인 사용자입니다.
좋은 글이라서 추천 드렸습니다. 다만 궁금한게 과학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공학이 아닌가요? 자연과학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분야인데 과학으로 볼 수 있는 세부 분야인가요?
지나가던 석사과정 나부랭이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의학 또는 의약학 등 뭐가 됐던 이 분야의 F=ma 는 한 단어로 정의하면 '항상성 유지' 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체의 항상성 유지에 문제가 생기면 질환이 생기는 것이고, 그 질환을 경험적으로, 그리고 근거가 있는 방법을 통해 치료하여 인체 본래의 항상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학 그리고 약학의 목적이니. 좋은 글 나눔 감사드리며 행복하게 연구하시다보면 분명 꿈을 향해 다가가계신 스스로를 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응원합니다.
2022.04.07
대댓글 3개
2022.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