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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머]대학원 관련 용어 정리 2편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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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의 삭막함- 연구실에서의 인간관계란 직장에서의 인관관계와 같다.

유학- 학생의 꿈, 지성과 교양의 상징, 선진 문물을 접하며 세련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이거나 친구도 없고 물가도 비싸니 공부에만 전념하여 성실한 연구자가 된 양 자기 만족할 수 있는 기회.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한 커리어 패스. 주로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간다.

그러나 일부 분야의 경우 해당 학문을 한다는 것과 유학을 가는 것 사이의 필연적인 상관관계는 그리 깊이 성찰되고 반성되지 않았다. 그런 분야의 경우 유학은 유학을 가면 취직 활동에 유리하다는 것과 아무래도 학문 종주국들이니 더 뛰어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어쨌든 외국어 하나는 익히리라는 기대 아래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서 보면 현실은 시궁창. 이름난 교수는 외부 활동 하느라 나 따위는 지도해 줄 여력도 없고, 학문종주국이라 학문 인프라가 빼어날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고 등등.

유행 - 학계에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태풍. 사람들은 그렇게나 강한 태풍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나간 자리가 전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훨씬 질서정연해졌음에 경이를 느낀다.

인문사회계와 공대의 갈등- 공대는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이 있어 그 일원으로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참여하여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인문사회계가 보기에 공대에서의 공부란 연습/사고의 훈련이 아니라 시간을 투자하고 그 결과물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으로 보이고, 반면 인문사회계의 경우 대학원 과정이란 더 높은 수준의 학부 수업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아 찌질해 보인다. 이런 찌질함은 인문학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공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리에이션은 인문학이 지금 대체 무슨 필요가 있냐, 인문학이 대학의 전공 학문으로 있을 필요가 있냐 부터 인문사회계도 이공계의 업적 평가 모델에 따라 논문 제출 수나 피인용수를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이에 대해 주로 행해지는 인문사회계의 응답은 “인문사회학은 창조적 사고 및 비판적 사고를 길러 주며..."라는 공통지반에서 출발하여 ”더 나은 삶에 대한 고민을 위해 남겨 둬야 할 영역“이라는 둥 “요즘 같은 지식 기반 사회에선 CEO 도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 등등으로 흘러 들어간다. 간혹 삐뚤어진 전공자들은 인문학의 철저한 무용성을 그대로 긍정한 후 그걸 자신들의 정신적 귀족성의 은밀한 표징으로 삼기도 한다.

인문학의 사회적 가치- 석사 이상까지 공부를 할 경우 분비되는 뇌내물질. 배운 사람한텐 보여요☆

자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공부를 마쳐도 보장되는 게 없을 거라는 스트레스+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길도 없다는 스트레스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는 대학원생이 버티다 못하면 내리는 선택. 사회를 향한 최후의 호소이지만 이슈는 되지 않는다.

제 3의 길- 공부는 계속하되 대학에 남아 있지 않고 외부의 길을 개척하려는 시도를 이르는 말.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부터 수유 너머까지 유형은 다양하다. 그러나 대개 못 살며, 이들에 대한 학계의 시선은 대체로 차갑기 그지없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아 언어 실력이 없다는 둥 학술적이지 못한 말랑말랑한 글만 써낸다는 둥 비난의 유형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대체로 둘 간의 진지한 학술적인 교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에 진지한 학술적 교류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일부러 왕따시키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절친한 동료 - '동료' 항목에서 언급된 사람들 중 비슷한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경우. 과거 절친한 동료는 알콜중독을 경유했으나 현재는 골프 및 테니스와 같은 합리적인 경로를 통하게 되었다.

정년보장tenure - 학계의 '진실'을 들춰내기 전 그 폭발에 대비하여 몸에 둘러야 할 방패. 방패를 얻지 못한 애송이 학자들이 성급히 학계의 진실과 대면했다가는 저 멀리 캔자스까지 튕겨 나갈 위험이 있다. 태풍에 쓸려가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잠시 눈 앞의 사막에 황망해하다가 방패를 땅에 떨어트리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부터 오아시스와 녹색 벌판이 나타나는 기적이 벌어진다. 정년보장을 받은 학자들은 남은 평생동안 그 벌판 위에서 지팡이를 들고 공을 때려 구멍에 집어넣는 의식을 수행하며 도를 닦는다. 학자의 이상적인 상태. 비슷한 말로 열반, 해탈이 있다.

조교 - 학문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티안나는일을 도맡아하는 고학력도우미. 교수의 개인비서, 운전기사, 일일교수대체강사, 학회/학과 공용머슴 등 다양한 변형태가 있다. 정당한 노동의 댓가 따위, 개나 주라지. 노동삼권따위, 소가 웃겠군. 안그래도 황량한 그놈의 학계에 썰렁한 먼지바람 일으키며 최저생계보장, 노동삼권보장 외쳤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존재의 흔적까지 사라져버릴 수 있음에 주의할 것. 따라서 소위 조교에 따라붙에 마련인 약간의 떡고물에 환장하기 전에, 쉰떡인지 안쉰떡인지 주도면밀히 사전탐색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조교제의를 받는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의 인간들은, 제코가 석자인 경우가 많아 이 전근대적 유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음. 봉투붙이기, 명찰만들기, 각종 문서 작업 및 편집, 전화연락, 식사예약, 운전, 청소, 장보기, 요리, 웃기기, 이야기(주로 자랑) 들어주기, 술마셔주기, 탬버린치기, 장단맞추기, 때로 통번역까지... 손발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서부터, 못하는 일마저도 배워서 처리하는, 당신은 진정한 올라운드 플레이어... (P.S 조교가 있다보니 손발이 있는 사람도 없는 척 하는 경우가 천지빼까리임.)

지도교수의 직무유기- 그냥 강의하는 교수가 아니라 지도 교수란 제도가 있는 이상, 지도 교수가 해야 할 일은 연구생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막연한 연구 주제를 끄집어 내 명료화시켜 주는 일일 게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수가 하는 일은 경우 원생들이 속으로만 끙끙 앓다 짜 낸 주제를 퇴짜 놓는 일이다. 그나마 이런 대화는 일 년에 몇 차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정 면담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교수가 지나친 열의를 보일 때도 있다. 연구 주제에 끊임없이 간섭하거나 굉장히 밀접한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부모 대리 찾으러 대학원 온 게 아니라면 이런 관계도 바람직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

토론문화- 교수와는 사담을 나눌 때도 의견을 제시하기 힘들다. 그런데 전공 영역에 대한 토론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패배주의- 대학원생의 기본적인 사고방식. 교수란, 학계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한다. 대학원에는 복종 아니면 저항의 두 가지 관계가 있으므로 그러려니 한다는 건 복종을 의미한다.

프랑스 - '미국'의 추종자들에 대항하는 이들이 참고하는 경전의 이름.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의 표지에 교묘하게 손질을 가해 제목만 바꾼 책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책표지가 매우 예쁘게 꾸며졌기 때문에 미적인 감수성을 갖추었거나 그런 평판을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좀 더 인기가 좋다.

학계 - 들어오는 과정이 너무나 험난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 존재를 믿고 있는 허구fiction. 만신창이가 되어 학계에 겨우 진입한 사람의 눈 앞에는 오즈의 마법사가 나타난다. 학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은구두로 바닥을 세번 두드리는 대신 양손으로 두 귀를 덮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제로 학계라는 이름의 넓은 사막에서는 두 귀를 막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즐겁게 살아가는 수행자들이 곳곳에 발견된다.

학계에 대한 신뢰- 학문의 규칙은 일차적으로는 학계의 규칙이다. 대개 성문화되어 있지 않은 불문율로, 그 기원은 베일에 싸여 있다. 그 미스테리함의 정도는 전공마다 다를 것이나 인문사회계의 경우 특히 심하다. 왜 이 논문이 학회지에 실렸는지(제출한 사람이 적으니까!), 왜 내 논문은 떨어졌는지 등등에 대해 판단하기란 무척 어렵다. 게다가 선행 학문 세대들의 경우 학계의 규칙은 커녕 학계 자체가 없던 시절에 공부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말을 얼마나 신뢰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다. 젊은 교수들이 학계의 주축을 이루게 될 시점부터는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도 해 보지만 그건 6,70 대가 죽으면 한나라당의 지배도 끝날 거라는 그런 기대처럼 허무맹랑한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도 있다.

학문공동체-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

학문의 사회적 가치- 논하기 위해선 저서가 필요하다. 그 저서의 결론이 가치의 확증이 될지, 부정이 될지, 변명이 될지는 써 봐야 안다.

학문적 정체기- 인문사회계의 경우 8,90년대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현대 프랑스에서 유래한 이론들이 지난 20년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많은 신진학자들이 그 수입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정치적으로든 학문적으로든 그런 대전환이 부재하는 시대이면서 여전히 그 시대의 자장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별 수 있는가. 유행도 슬슬 끝물이다. 세련된 이론이 사회와 뭔가 유의미한 소통을 하리라는 기대는 빗나간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데 힘 빼지 말고 전공 열심히 파서 스페셜리스트 돼야지♡

학문 내 소통- 같은 전공이라도 영역이 다르면 서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또한 사례 연구보다 이론 연구가 높이 평가 받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원로 교수들의 뭔가 그럴 듯한 이론에 기반해 사례 연구를 해 보지만, 그들로부터의 피드백 따윈 없다.

학문 후속세대- 민주화와 더불어 자라난 진보적 학풍을 이어 받을 세대. 현재 사회의 문제가 청년 세대에 있다면 현재 학계의 침체는 선배들만 못한 후배들에게 있다. 그러나 정작 후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기들이 뭘 잘못했길래 후속세대가 없나도 고민하지 않는다.

학비- 학부 학비보다 2-30% 가량 더 비싸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교수 1인 당 1명에게 학비 면제+약간의 월급을 주게끔 조교로 고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없는 대학이 더 많다. 많은 경우 부모들은 교수자식 두는 데 대한 환상이 있으므로 간곡하게 설득하면 기꺼이 학비를 대 준다. 부모에게 손을 벌리든 아니든 간에 대부분의 학생들의 마음속에도 언젠가 교수가 되어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기본적으로 조금씩은 있다.






























학회- 동창회 또는 경로당. 흥미로운 논문은 발표되지 않고, 흥미로운 지적질도 이뤄지지 않는다. 대충 구색 맞추기로 쓴 논문 들고 나와 슬렁슬렁 읽고 들어가는 게 전부. 그렇지만 원로들 눈 밖에 나는 일을 해선 절대 안 된다. 원로들이 싫어할 주제도 안 되고, 원로들 지적질에 반박해도 안 되고, 원로들 논문(만약 그들이 발표를 할 경우)에 지적질을 해도 안 된다. 몇 번 학회를 다니다 보면 공부란 결국 독고다이로 하는 수밖에 없단 걸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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