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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예수와 베드로사도의 죽음을 통해서 본 육체적고통을 넘는 영적의미 - 홍익대 경영학과 안효영

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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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학년도 2학기

논리적사고와글쓰기

기말고사 대체과제













예수와 베드로 사도의 죽음을 통해서 본 육체적 고통을 넘는 영적 의미

주제문 : 예수의 죽음과 베드로의 죽음을 비교하면 그 죽음의 의미의 중요성이 육체적 고통의 양보다는 정신적, 영적고통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학과: 경영학과

학번: C031271

이름: 안효영

목차


Ⅰ. 서론


Ⅱ. 예수와 베드로의 죽음

1. 예수의 죽음

2. 베드로의 죽음


Ⅲ. 예수와 베드로의 죽음의 의미

1. 예수 죽음의 의미

2. 베드로 죽음의 의미


Ⅳ. 결론

Ⅰ. 서론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 사명의 의미와 목적을 서술하고 그의 12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인 베드로 사도의 역십자가 죽음과의 비교를 통해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선 영적, 정신적 의미의 차원에서 왜 예수의 죽음이 베드로의 죽음보다 종교적 가치가 더 큰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 2000년 전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그런데 헤롯 왕은 예수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듣고 아기 예수를 군사들을 시켜 살해하려고 한다. 예수의 탄생은 이렇듯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의 시작으로 이해된다. 신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러 기적을 세우자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생겨났다. 그 중 베드로는 예수의 첫 번쩨 제자로 예수 수난기에 예수를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하지만,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포교활동을 이어가다 박해를 받고 역십자가형으로 죽는 등 높은 신앙심을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도 전승되는데 그가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베드로가 반석이라는 뜻인데 교회의 반석으로서 하늘이 베드로를 지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고 하느님 아버지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포교활동을 이어가다 박해를 받고 결국 역십자가형을 받아 죽게 된다. 베드로가 역십자가형을 받게 된 경위는 베드로가 감히 스승인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인물의 죽음을 보면 비록 예수와 베드로의 죽음 모두 박해를 받다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지만, 어떠한 영적 의미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더 신앙적 의미에서 흠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표면적인 죽음의 양상만 보면, 예수의 죽음은 단순 십자가형이고 베드로의 죽음은 역십자가형이므로 베드로가 받은 굴욕이나 수치심, 그리고 육체적 고통이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분명히 그 상황을 굴욕적으로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히 스승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고 여긴 베드로는 자신의 역십자가형을 기쁨과 어떠한 영적 의미로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의 눈에서 보면 역십자가형의 고통이 더 커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단순 육체적 고통만을 비교하자면 베드로가 더 큰 고통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영적이고 정신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게 된다면 그것은 하늘과의 올바른 조우이자 하느님의 아들로서 올바른 예수의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19장은 ‘선’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어찌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마태 19장 16,17절)

구약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한 것이라면 신약의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삼위일체론에 따라 하느님과 위격만 다른 것이지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예언된 하늘의 뜻이라면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인간이라는 신보다 열등한 존재로서의 숙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극대화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분명히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이다. 이성과 과학의 발전, 그리고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암흑의 중세시기를 끝내는 과학적 이성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현대에서는 구조주의 철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칸트에서부터 이어지는 비판철학은 하지만 이러한 구조주의가 가진 한계를 의미있게 포착하고 있다. 인간은 구조 안에서 분명히 상호작용하고 그 기능으로서 역할을 부여받는다는 구조주의의 설명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체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유의지를 더더욱 긍정하는 비판철학이야말로 구조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지적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어차피 그가 신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면 인간은 숙명론적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로 대표되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자유의지로 신앙을 선택했고 자유의지를 갖고 스승인 예수를 따른 것이다. 여기에 어떠한 숙명론적 요소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역십자가 죽음도 충분히 굴욕적이었고 신 앞에서 제대로 엎드린 것이며 주님을 제대로 흠숭하고 있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베드로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죽음의 자세가 거꾸로 되었는가 아닌가 여부는 신앙의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닐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 즉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지만 과연 인간은 인간으로, 제자는 제자로만 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신앙의 근본적 의문을 던져본다.




Ⅱ. 예수와 베드로의 죽음


1. 예수의 죽음

이 절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분석하여 그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맑히는 것이 본 절의 목적이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그분께 마시게 하였다. (마태 27장)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고난 끝에 십자가에 못박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를 외친다.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저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천주교에서 주로 외우는 ‘사도신경’에서도 예수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모두 깊은 절을 한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위의 구절은 가톨릭 기도서 사도신경의 일부분이다. 예수는 빌라도 통치 아래 고난을 받다가 십자가 죽음 이후 사흘 만에 되살아나서 제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예수 죽음의 신학적, 철학적 의미는 예수가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는 데에 있다.


2. 베드로의 죽음

이 절에서는 예수의 12제자 중 으뜸사도인 베드로의 역십자가 죽음의 신앙적 의미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 본 절의 목적이다.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오.” 하며 부인하였다.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요한복음 18장)


성경에서의 내용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따른 제자이지만 예수의 수난 앞에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한다. 예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체험 이후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강화한다.


예수 승천 후 베드로는 예수를 대신하여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 초대 교황이 되었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여 소유를 공동으로 할 때 자신의 소유를 속인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이후 헤로데 1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교회를 지도하던 중 네로 황제의 박해에 휘말려 거꾸로 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전 아래 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진다.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나라의 열쇠를 부여받았기 때문에(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9절)라고 주장하며 가톨릭교회는 이에 근거해 교황을 선출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도 바울로와 같은 날짜인 6월 29일을 베드로 사도의 대축일로 기념하고 있다.(위키백과-베드로)


베드로는 예수 사후에 예수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 교황이 되었다. 이후 자신의 신앙 때문에 왕에 의해 박해를 당하다가 로마에서 교회를 지도하던 중 네로 황제에 의해 거꾸로 십자가에 박혀 순교하게 된다. 베드로가 이러한 죽음을 맞은 것은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감히 스승인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베드로가 스스로 청한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들 수 있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죽음은 굴욕적일 수는 있으나 더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을 텐데 왜 예수가 베드로보다 더 존경 받는가? 그것은 베드로의 죽음보다 의미 있는 어떤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예수 죽음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예수와 베드로사도 죽음의 의미를 비교 연구한다.



Ⅲ. 예수와 베드로의 죽음의 의미


1. 예수 죽음의 의미

이 절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분석하여 예수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본 절의 목적이다.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역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였다는 데에서 신앙적인 의미까지 그 의미가 확장된다. 베드로는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교황으로서 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주님을 향한 믿음 그 이상이었다. 결국 그는 박해를 당하다 역십자가형으로서 순교한다. 예수는 당연히 그의 스승으로서 더 고결한 의미를 갖는다.


“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고, 보냄을 받은 이는 보낸 이보다 크지 않다.”(요한복음 13장 16절)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높을 수 없다.”(마태복음 10장 24절)

“제자는 스승보다 높을 수 없으며, 다만 잘 배우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복음 6장 40절)


스승과 제자, 그라고 보내는 이와 보냄을 받은 이에 대한 성경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당연히 베드로가 아무리 역십자가형으로 육체적으로 더 강한 형벌을 받았을지라도 그것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삼위일체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비할 바는 못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제자가 잘 배우면 다만 스승처럼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 보냄을 받은이(제자)가 보낸이(스승)보다 높아질 거라는 예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관련 구절으로서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된다”라는 내용의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구절이 하느님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은 복음서의 절정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남은 생애를 투신하였

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태동하게 된다. 당연히 이런 초대 교회가 전파하는

핵심 메시지도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었다. 또한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반성이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피하고 싶었지만 고

뇌와 번민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묵묵히 받아들였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일 때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받아들일 때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예수 역시 자신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확실한 이해가 있었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나 제자들마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자기이해는 더욱 자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자

기 죽음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을까? 여기에 대해 복음사가들은 예수

의 입을 빌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복음서에서 예수가 이해하고 있는 자

기 죽음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특히

그 의미가 잘 드러나는 마태오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교회 전통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으며,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교회도 재구성 되었다. 이러한 ‘주님’의 죽음은 신학적으로는 어떠한 의미를 지녀야 할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는 당연히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 삼단논법의 대표예시로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도 인간의 불멸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신이 어떻게 죽음을 당할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아주 작고 약한 생명체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신의 죽음은 가능했다. 가장 낮은자를 향한 신의 사랑은 가히 절대적이다.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또한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천주교의 미사에서 사용하는 미사통상문에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미사를 드린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의 역사에서 예수의 죽음은 가히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장에서는 으뜸사도인 베드로 사도의 죽음과 교황권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2. 베드로 죽음의 의미

이 절에서는 으뜸사도인 베드로의 죽음을 분석하여 예수 죽음과 그 의미를 비교 분석을 통해 베드로 죽음의 의미를 찾는 것이 본 절의 목적이다.

베드로의 죽음은 베드로의 스승인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인한 박해를 받다가 끝내 스승과는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없었던 베드로는 역십자가형을 받고 죽는다. 베드로가 이러한 형벌을 받는 것은 겉모양은 정반대라고 볼 수도 있고 매우 닮은 모습으로 죽었다고 볼 수도 있다. 겉보기에는 십자가형과 역십자가형은 자세가 정반대이므로 정반대의 형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형과 역십자가형은 ‘십자가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예수님을 인간이 될 수 있는 가장 좋고 선한 존재로 가정하자면 베드로는 으뜸사도로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제자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베드로(Peter)의 원래 그리스어 이름은 '시몬(Simon)'이었는데, 예수가 그에게 '게바(반석이라는 뜻)'라는 아랍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 '페트로스'이다. 베드로는 유복한 어부로서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예수가 몇 가지 기적을 행한 장소로 등장하는 주택도 소유하고 있었다. 복음서에 언급된 예수가 사용하였던 어선들도 모두 베드로의 배였다. 그의 집에는 그의 가족, 장모, 그의 동생인 안드레가 같이 살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개방된 곳이었다. 예수는 베드로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그 집에서 마비와 불구 환자를 고쳐주었다. 마리아와 가족들이 예수를 걱정하며 그가 받은 사명을 포기하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하던 곳도 이곳이었다.

예수 사후 베드로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아그리파 1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에서 전도하였다.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 박해를 견디다 못해 돌아오던 중 예수를 만나게 된다.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 묻는데 “나는 도망쳐 나온 네 대신 로마로 가노라”는 그의 말을 듣고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가서 순교한다. 베드로는 자기는 예수와 같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므로 예수가 당한 것과 같은 자세로 처형을 당할 수 없다며, ‘머리가 거꾸로 향하는 십자가형’을 자처하였다. 그는 후에 로마 초대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베드로 종(鐘)에는 그가 열쇠를 쥐고 있는데, 기독교와 기독교 교회를 정립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표시이다.



시몬 베드로는 유복한 어부였었다. 주택과 가정도 있었다. 베드로는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베드로는 순교 이후에도 교회의 반석인 교황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베드로의 죽음은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앙적 죽음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제자의 죽음이 인류구원의 차원에서 더 뛰어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수 없다”는 성경의 구절과 “보냄을 받은 이가 보낸이보다 더 높을 수 없다.”는 말씀처럼 베드로의 죽음이 신앙적 차원에서 의미를 지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인류구원 사업에 어떠한 전능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Ⅳ. 결론


지금까지 예수의 죽음과 그의 제자인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 예수 죽음과 부활의 의미와 베드로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특히 예수의 죽음이 인류 구원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리고 예수와 베드로의 사제관계는 현대의 사제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베드로의 죽음도 그 신앙적 의미는 갖지만, 예수의 죽음이 갖는 신적권위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수 없다”는 성경의 구절과 “보냄을 받은 이가 보낸이보다 더 높을 수 없다.”는 말씀처럼 제자 베드로의 죽음이 신적이고 전능함에 이르는 권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베드로의 죽음을 단선적으로 그 육체적 고통만을 비교하여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의 의미를 넘는 영적이고 정신적 의미에서 둘의 죽음을 비교 연구할 때 우리는 이들 성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단행본과 논문

가톨릭성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톨릭기도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미사통상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이진희(2011), 〈예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 마태 26,28을 중심으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인터넷 자료

이재태(2015), 〈베드로는 왜 거꾸로 십자가형을 받았나〉, 코메디닷컴, (https://kormedi.com/1214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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