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유가 좀 생겨서 김박사넷을 구경하는데 학벌 관련 글들이 많이 보이네요. 그 와중에 상처 입은 지방대 출신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몇몇 글에 댓글을 달다가, 저의 생각을 많은 지방대 출신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글로 적어보려 합니다. 강조하고 싶은 키워드로 문단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미리 밝히자면 저도 지방사립대 학부 나왔습니다.
1. 본능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미래까지 멋대로 판단해버리는 글들을 보면 저도 기분이 나쁘긴 합니다. 근데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못나보디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건 그냥 모든 사람의 본능입니다. 더구나 김박사넷은 아이디조차 없고 완벽한 익명 시스템입니다.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하기 딱 좋죠. 이런 공간에서 지방대 출신을 무시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제 얘길 해보자면 저는 수능에서 정확히 딱 평균 '3.0' 등급이 나왔습니다. (10년대 초반 학번, 가형+과탐) 정시로는 저의 모교 (지방사립대)에 합격을 장담하지 못할 성적이었는데 다행히 수시로 붙었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평균 5~6등급 성적의 학생들이 진학하는 다른 지방사립대 재학생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한 때 있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긴 했습니다만, 결국 저도 똑같다는 겁니다. 지방대 출신을 무시하는 글을 올리는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적어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을 폄하하는 건 모든 사람의 본능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방대 출신을 무시하는 글을 게시하지 마세요"라고 요구하는 건 "저 기분 나쁘니까 여러분의 본능을 거스르세요"라는 요구입니다. 이는 매우 순진할 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기까지 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받아들이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기분도 좀 덜 나쁩니다. 물론 조금 기분이 나쁘긴 합니다 ㅋㅋ. 제 인격이 뭐 그렇게 훌륭한 것도 아니고 ㅋㅋ.. 무시당했을 때 기분 나쁜 것도 본능이니까요.
2. 결과 우리 프로페셔널하게 결과로 얘기합시다. 연구자로서의 커리어에서 첫번째 관문은 '대학입시'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학교 다니는 분들은 대학입시에서 우리보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대학원 입시 또는 학부 취업 시에 학벌이 중요한 평가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것이 「결과」이니까...
교수님들 바쁩니다.. 기업 인사담당자도 바쁩니다... 학벌, 학점 같은 정량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지원자의 기대역량을 빨리빨리 평가하고 싶어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게 불공정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도의 카스트나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처럼 신분에 따라 나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는 건 아니잖아요. 눈 조금만 낮추면 대학원 진학할 수 있고, 거기서 또 노력하면 좋은 결과 낼 수 있잖아요. 그런 사례가 많기도 하고요.
물론 지방대 출신으로서 쉽지 않겠죠. 그렇다고 해서 "학벌로 차별하지 마라!!!" 라고 하는 건 모든 걸 다 원점으로 돌리자고 하는 건데.. 그거야말로 불공정한 거 아닐까요?
교수를 뽑을 때는 연구성과 가지고 평가해서 뽑을텐데, 연구성과 별로 안좋은 사람이 "내가 교수돼서 연구 더 잘할 수도 있잖아!! 연구성과 가지고 차별하지마라!!!" 라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다시 수능을 봐서 좋은 학부를 들어가든, 아님 대학원 진학해서 좋은 연구성과를 내든, 결과만 가지고 얘기합시다. 결과를 가지고 얘기해야 말이 통합니다.
3. 과장법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할 때 과장법을 사용합니다. 고등학생 때 좋은 대학 못가면 인생 자체가 매우 비참해지는 것처럼 많이들 얘기하는데 우리 인생 뭐 그렇게 엄청나게 비참한가요? 전 아니던데..
정신승리일 뿐이라고, 지방사립대 나온 주제에 기를 쓰고 연구하겠다고 용쓰는 너의 인생은 비참한 게 맞다고 하시는 분들까지 설득할 자신은 없습니다..
김박사넷에 댓글과 게시글로 올라오는 지방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익명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고, 계속 말씀드리지만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꽤 좋은 나라이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상당히 열려 있는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이야기들에 너무 휘둘리지 맙시다.
4. “capacity” vs “competence” 이건 정말 순전히 저의 뇌피셜이긴 한데요, 한국에서 시행되는 대부분의 시험은 "capacity" 보다는 "competence”를 훨씬 더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전자는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시간 제약 없음)” 를 측정한다면, 후자는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가?” 를 측정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수학올림피아드는 capacity에 초점을 둔 시험 같고, 수능수학은 competence에 초점을 둔 것 같습니다. 과학고 다니면서 수학올림피아드 준비했던 친구들이 수능 수학은 의외로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 연구는 "capacity" 가 더 중요한 영역인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두뇌회전이 조금 느려도, 노력과 근성만으로도 여전히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capacity와 competence 사이에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전자 (capacity)에 비해 후자 (competence)가 조금 부족했던 것 같은 분들의 사례, 즉, 학벌이 안좋지만 좋은 연구자로 살고 계신 분들의 사례가 꽤 많습니다. 쥐어짜내지 않아도 주변에 심심찮게 보입니다. 탑급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꽤 괜찮게 여겨지는 직장에 자리잡은 분들까지 범위를 넓히면 더욱 더 많습니다. 당장 제 주변에 있는 분들 몇 분 소개해볼게요.
1) 연구실 선배 중 이름이 잘 알려진 제약회사의 연구개발 부서에 재직중이신 분은 서울 소재 모 사립대의 지방 분교 학부 출신입니다. 2) 연구실 선배 중 모 정출연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신 분은 대전/충청 지역의 지방 사립대 학부 출신입니다. 3) 학부 졸업 후 잠시 인턴으로 근무했던 모 정출연의 선임연구원 분은 지방 사립대에서 학석박을 모두 마치고 국내 정출연에서 포닥으로 근무하셨던 분입니다. 4) 대학원 재학 중인 학교에 신규 임용되신 30대 초반의 한 젊은 교수님은 지방 사립대에서 학부와 석사를 졸업하시고 국내 비SPK 학교 연구실에서 박사과정 마치셨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CNS 본지에 1저자로 논문 내셨습니다. 5) 대학원 재학 중인 학교, 학과에 스카우트 되신 한 교수님은 지방 국립대 학부 출신입니다.
다섯 분 중 네 분은 제가 직접 뵌 분들이고 그 중 두 분은 갠톡 주고 받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이 외에도 더 계세요. 저도 이 분들처럼 competence는 조금 부족했지만 capacity는 결코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기를 바라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5. "운명" 우리 각자의 운명을 좀 사랑합시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자구요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20대를 대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해준 모교에 대해서도요.
좋은 학교 나온 사람이 지방대 무시하는 건 앞에서도 말했듯이 본능이라서 뭐 어쩔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리가 스스로를 비하하진 말자구요. 자기객관화를 넘어서 무슨 완전히 무가치하고 발전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신데.. 그런 지나친 겸손은 약간 뭐랄까... 다음과 같은 심리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추면 남들이 안쓰러워서라도 좀 올려치기 해서 보정해주겠지?'
이런 태도.. 성품이 특별히 따뜻하신 분들이 느끼기에는 “또 시작이네” 싶고,, 지겹고 지치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타격감 오지는 먹잇감이라는 인식만 심어줄 뿐입니다. 정글같은 김박사넷에서는 더더욱요..
이와 관련해서 다른 분이 쓰신 글 중 감명 깊었던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김박사넷에 있었던 글인데 못찾겠네요. 찾게 되면 댓글에다 링크 올려볼게요. "세상은 잔뜩 주눅 들어있는 사람한테까지 찾아가서 먼저 기회를 줄만큼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제 얘기를 좀 해볼까 하는데요. 저의 모교에 대한 마음은 저의 부모님을 향한 마음과 비슷합니다. 저희 부모님 사회적으로 그렇게 엄청 대단하신 분들 아닙니다. 인격적으로도 완벽한 분들 아니고요. 근데 엄청 사랑하고 엄청 존경합니다. 다른 부모들과 '비교'해서 더 나은 분들이어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게 아닙니다. 우주를 떠돌아다니던 작은 원자들로 존재하던 저에게 삶을 선물해주신 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마찬가지로 저의 모교도 엄청 사랑하고 엄청 좋아합니다. 저의 모교.. 개신교 계열이라 욕도 많이 먹고.. 주변에 뭐 아무 것도 없고.. 이름부터 되게 지방사립대 같고.. 돈도 별로 없고.. 역사도 짧고.. 아무튼 뭐 흠모할 것 하나 없읍니다... 그래도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소중한 저의 모교입니다. 저에게 연구자라는 꿈을 꾸게 해준 곳이거든요. 최근에 학령인구가 줄어서 지방대학 입결이 많이 내려갔다는데 입결과 상관없이 우리 후배들 너무 사랑스럽고 궁금하고 잘 됐으면 좋겠고 뭐라도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습니다. 모교의 영문 이니셜이 가슴팍에 대빵 크게 박힌 후드티 두 벌 있는데 봄 가을에 줄창 입고 다닙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좌절하고 속상해하기만 하면 끝도 없습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 질투할 필요도 없고 추앙추앙 해드리면서 배울 거 있으면 배우고, 뭐 그냥 그렇게 살면 남한테 피해 안끼치면서 내 주변 사람들 잘 챙기고 재밌게 잘 살더라구요. 저도 그렇게 살려고요. 인생 뭐 있습니까.
김박사넷에서 누가 막 무시하고 폄하하면 기분 좀 나쁘고 잠깐 속상하고 끝이지, 그래서 그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 실질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해요.. 면전에서 모욕당한 것도 아니구요..
아무튼 뭐…ㅎ 소주 한잔하면서 나눌 법한.. 길고 장황한 글을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요약하며 마칩니다.
1. 지방대 출신을 폄하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도, 그 말들에 휘둘릴 필요도 없다. 2. 철저하고 냉혹한 자기 객관화는 필수, 하지만 지나친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은 본인 포함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 3.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고 자기 운명을 사랑하면서 우리 인생 행복하게 살자.
늦더위가 기승이긴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확실히 선선하네요 주말의 끝자락, 편안히 보내시고 돌아오는 한 주도 파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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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2개
2023.08.20
김박사넷은 과장이 많이 심합니다. 명문대 갔다고 인생이 술술 풀리거나 지사립 갔다고 인생이 완전히 꼬이거나 하는 마법같은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명문대 가서 취업 실패해 고생하는 사람도 봤고 지사립 가서 좋은 기업에 취직해 잘 살고 있는 사람도 봤습니다.
원하는 목표를 위해 열심히 하시면 그 목표에는 가지 못해도 목표 근처에는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예 동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을 겁니다. 힘내십시오.(이건 비단 지사립 분들에게만 하고 싶은 말은 아닙니다.)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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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0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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